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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작가별 시

조지훈 시 모음

by MrPaver 2019. 12. 29.

 

조지훈 생애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 『문장(文章)』지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39년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풍의상」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승무」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다.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시키고 있다. 조지훈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풀잎단장(斷章)』(1952)·『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1956)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박목월(朴木月)·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고사(古寺) 1」·「고사 2」·「낙화(落花)」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 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 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청록집』 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역사앞에서」·「다부원(多富院)에서」·「패강무정(浿江無情)」 들이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기타 저서로는 시집 『여운(餘韻)』(1964)과 수상록 『창에 기대어』(1956), 시론집 『시의 원리』(1959), 수필집 『시와 인생』(1959), 번역서 『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655)


조지훈 시세계

 지훈의 작품세계를 그 주제면에서 초기의 고전, 중기의 자연, 후기의 자아로 나눌 수 있다. 고전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자아로 넘어오는 어간에 과정적인 특성을 가진 일련의 작품계열을 설정할 수 있으나 그 윤곽이 위의 세 큰 구분만큼 뚜렷하지 못하다. 고전, 자연, 자아의 세 산맥을 다시 그 주제의식의 배면에서 살펴보면, 1) 고전에 대한 민족문화적 애착과 회고에서 그의 민족의식을, 2) 자연에 대한 초탈한 관조와 방랑에서 그의 인생을, 3) 자아에 대한 내면응시와 철학적인 탐색에서 그의 우주감각을 도출해낼 수 있다.
... 지훈시의 본질은 이러한 충동의 승화에 있지, 미리 설정된 형이상적 세계의 탐구나 그 생명의 본질에 대한 강렬하고 끈덕진 추구에 있지는 않다. 외계나 자체 안의 정신적 불안이나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훈의 시정신은 필연적으로 온건한 조화와 균형, 지적인 평형과 정서인 안정, 미적인 완벽의 희구에 있지, 모험이나 혈투, 자기부정이나 심연에의 투신몰입, 또는 외부에 대한 치열한 저항에 있지는 않다. ... <파초우>나 <산방>, <낙화>의 시에서 그는 감상과 소탈감, 고독의 세계를 연탄하면서도, 자연을 통한 향수를 읊조리는 경지에 머물러 고요하게 인생과 자연을 관조하는 자세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았다. 그 자연을 바라보고 영탄했을망정 거기에 몰입하거나 거기에 귀의하지 않았다. ... 이 자아의 세계, 어떻게 보면 매우 탐색적이고 달관적이고, 세계관, 우주관적이면서도 지훈의 이러한 시세계는 그 자체의 시미적(詩美的) 조화와 시정신적(詩精神的) 균형을 상실하거나 파괴하지 않기 위해, 어떤 허무나 암흑이나 무의 심연, 생명과 존재, 실체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거나, 몸부림치거나 절규하지 않고 있다.허망을 노래하고 죽음을 동경하면서도 자기자아는 언제나 하의의 관조자(觀照者), 정신의 편력자(遍歷者)로 위치해 있다. 어떤 결정론적인 막다름이나 종교적인 높이와 그 귀의의 세계로 자신을 이끌고 들어가지 않고 있다. ... 1939년에서 1968년까지의 한 생애를 지훈은 가장 암담하고 격렬하고 다난한 시대에 살면서, 그의 유래없이 투명한 감성, 밝은 지성, 예리한 감각과 윤택한 정서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시사에 하나의 불멸의 업적을 남겨 놓았다. 한국적 정서를 동양적 전통으로 융화비약(融化飛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인 동양의 정서를 한국의 정서로 승화정착(昇華定着)시키는 작업, 한국의 민족정서의 서정을 정립시키는 훌륭한 성과를 남겨놓았다.
(출처 - https://m.cafe.daum.net/krcho45/VP0T/80)


<조지훈 시모음>

흙과 바람

조지훈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넣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사이
햇살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 생전
살의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었노라고

 

 

호수(湖水)

조지훈

장독대 위로 흰 달 솟고
새빨간 봉선화 이우는 밤

작은 호수로 가는 길에
호이 호이 휘파람 날려 보다

머리칼 하얀 옷고름
바람이 가져가고

사슴이처럼 향긋한
그림자 따라

산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행복론 (幸福論)

조지훈

1.
멀리서 보면
寶石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데도 없다
幸福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 三間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女人

조지훈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고풍의상 ( 古風衣裳 )

조지훈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주 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샅샅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이다.

 

 

기다림

조지훈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이 자랑 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 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울리야...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새아침에

조지훈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태초 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와 불의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산상(山上)의 노래

조지훈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 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산방(山房)

조지훈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차운데

볕받은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움직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꿈 이야기

조지훈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마음의 태양

조지훈

꽃 사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자.

가시밭길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른다.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자.

 

 

민들레 꽃

조지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 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 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지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 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제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병(病)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빛을 찾아가는 길

조지훈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사모

조지훈

사랑을 위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아마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이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밤에 울어 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 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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